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 김하나는 자신의 지향점이나 캐치볼 위클리의 정신을 이렇게 밝히고 있었다.

<한 사람이 진정으로 자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집 평수나 자동차 브랜드가 아니라 자신의 친구입니다. 그 친구가 얼마나 잘 나가는지, 얼마나 힘이 있는지가 아니라 친구가 얼마나 요리를 잘하는지 누구는 또 얼마나 잘 얻어먹는지 얼마나 잠을 잘 자고 얼마나 노래를 잘하며 얼마나 약지 못했는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술을 마셨고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추억을 가졌는지 인생에서 진정으로 자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그런 것들입니다.>

(...)

“친구들은 사회적 정서적 안정망이다.” 김하나가 늘 강조하던 이야기처럼 우리는 서로 의지하며 같이 살고 있다. 다른 온도와 습도를 가진 기후대처럼, 사람은 같이 사는 사람을 둘러싼 총체적 환경이 된다. 상대의 장점을 곧잘 발견하고 그걸 북돋아주는 김하나의 칭찬 폭격기적 면모에 내가 가장 직접적으로 수혜를 받는 것처럼 말이다. 많은 술을 마시고 어처구니없는 추억들이 쌓인다. 요리를 잘하고 또 잘 얻어먹는다. 이런 데 자부심을 느껴도 좋다는 사실을 나는 동거인에게서 배워간다. 김하나라는 신대륙을 발견하고서 열린 새 세계다.


🔖 “창밖으로 플라타너스들이 눈 아래 일렁이는 게 바다 같았어.” 그리고 차에 타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나도 좋아.”

나는 그 순간 세상 모든 플라타너스 잎이 한꺼번에 펄럭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 “인생이란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렇게 바꾸어도 말이 될 것 같다. “사람은 멀리서 보면 멋있기 쉽고, 가까이서 보면 우습기 쉽다.” 충분한 거리를 둘 수 없기 때문에 서로 한심하고 웃기는 순간도 목격하지만 그럼에도 나에게 동거인은 여전히 멋있는 사람이다. 눈속임이 불가능할 만큼 가까이에서 삶에 대한 근면함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내가 시간을 사용하는 방식이나 생활을 대하는 태도 역시 낱낱이 동거인에게 목격될 거라는 자각은, 너무 방만하게만 살지 않도록 나를 다잡아준다. 그 증거로 오늘 글 한 편은 쓸 거라고 큰 소리를 치다가 미루고 미룬 밤에 거실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편 건 동거인에게 너무 한심하게 보이고 싶지 않은 긴장의 발로였다. 내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테이블 건너편 자리에서는 동거인이 역시나 잠옷을 입은 채 연재하는 수필을 위한 삽화를 그리느라 애쓰고 있다. 비염이 심해져서 콧물을 막기 위해, 한쪽 콧구멍에 티슈를 길게 말아 꽂은 채로 말이다. 오늘도 내 동거인은 아주 우습고 또 존경스러운, 딱 그만큼의 거리에 있다.


🔖 자취와 독신의 구분에도 이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 언제까지를 ‘자취’라고 부르는가? 그건 아무도 정해주지 않는다. 당신이 어느 날, 스스로의 생활을 ‘독신’으로 바꾸어 부르는 순간까지다. 그 이전의 생활은 제각각인 수건들의 시기와도 비슷하다. 어찌어찌 시작되었고, 시작되었으니 그럭저럭 이어진다. 내 생각에 자취와 독신을 구분하는 가장 큰 차이점은 지금의 생활을 ‘한시적’인 것으로 여기느냐 ‘반영구적’인 것으로 여기느냐 인 듯하다.

나는 나의 생활이 자취에서 독신으로 바뀐 시점을 정확히 알고 있다. 그것은 앞서 말한 나의 아름다운 책장이 생긴 날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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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되어 내 집의 한 벽을 가득 메운 책장은 대단히 멋있고 아름다웠다. 키 156cm에 체구도 자그마한 내 친구가 손으로 직접 만든 육중하고 근사한 가구. 책을 꽂는 기능을 넘어선 뭔가 엄청난 것이 내 집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월넛과 오크의 아름다운 색깔과 무늬, 두툼하고 단정한 선들, 매끄럽고 따뜻한 표면의 질감, 칸칸이 만들어내는 리듬과 균형. 이 가구는 집에 대한 나의 마음가짐을 재배열했다. 어른이 된 느낌이 들었다. 소품이나 가구를 들이드러다 책장과 결이 맞을지 고민하기 시작했고 아주 신중해졌다. 이제 내 집의 가구와 물건들은 이후의 어떤 시점에 이르기 전가지 한시적으로 쓰는 것들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물건’을 마련할 그날 같은 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제대로 된 물건이 얼결에 들어서버리자 생활이 가지런해졌다. 아름답게 잘 만든 물건의 힘이란 이토록 강력하다. 내게 있어 자취가 아닌 독신 생활은 정확히 이 책장이 들어온 날 시작되었다.